신시내티 레즈 구단의 역사
신시내티 레즈는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 야구팀이다.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중부 지구 소속이다. 신시내티는 세계 최초의 프로야구팀인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가 창단된 도시로 유명하다. 1866년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의 졸업생들로 이루어진 아마추어 야구 클럽으로 창설된 레드스타킹스는, 3년 뒤인 1869년 내셔널 야구선수협회 소속하의 프로팀으로 탈바꿈한다. 이때 레드스타킹스에 소속된 선수들은 3월 15일부터 11월 15일까지 8개월간 보수를 받는 완벽한 의미의 프로야구 선수들이었으며, 그 결과 이들은 최초의 10인으로서 야구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1869년 5월 4일 아마추어팀인 그레이트 웨스턴스 오브 신시내티를 45 대 9로 이기고 프로팀으로서 화려하게 데뷔한 레드스타킹스는, 당시 유일한 프로팀이었던 만큼 미국 야구계에 군림하였다. 미국야구선수협회에 소속된 팀들을 상대로만 57승 무패의 성적을 거두었으며, 이 이외의 팀들을 상대로도 극강의 모습을 보인 끝에 1869년을 65승 무패의 경이로운 성적으로 장식했다. 다만 샌프란시스코와 보스턴 등의 여러 도시들을 순회하는 미국 투어 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이유로 챔피언십에 불참했기에, 전승우승 요건은 물론 전승 요건도 갖추지 못했다는 게 함정. 레드스타킹스의 연승 행진은 이듬해인 1870년 6월 14일 브루클린 아틀란티스에게 7 대 8로 패배할 때까지 84경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프로팀은 있어도 프로리그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레드스타킹스는 미국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상대팀을 찾아야 했으며, 이러한 불안정한 운영은 수입원 또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 팀은 명색이 프로팀이었던 만큼 당연히 다른 아마추어팀들보다 막대한 재정을 소비해야 했으며,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이 팀을 후원한 애런 챔피언마저 사장직에서 물러나자 레드스타킹스는 곧 존폐의 기로에 서고 말았다. 새 사장에 취임한 A.P.C. 본트는 재정 악화를 이유로 선수들 전원에게 내년 계약 불가를 통지했으며, 그 결과 레드스타킹스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선수들 중 해리 라이트를 비롯한 4명은, 1871년 최초의 프로리그를 구성한 내셔널 프로야구선수협회 산하의 신생팀인 보스턴 레드스타킹스에 합류한다. 그리고 나머지 선수들은 내셔널 프로야구선수협회 산하의 또 다른 신생팀이자 수도 워싱턴 D.C. 의 최초의 프로야구팀인 워싱턴 올림픽스와 계약한다. 워싱턴 올림픽스는 2년밖에 존속되지 못했지만 보스턴 레드스타킹스는 내셔널 프로야구선수협회가 해산된 1875년 이후에도 한 번의 해체 없이 끈질기게 살아남은 끝에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 오고 있으며, '레드스타킹스'란 명칭의 잔재는 보스턴을 연고로 하는 또 다른 구단에 남게 되었다. 이후 신시내티에는 한동안 프로야구팀이 존재하지 않다가, 1875년 새로이 창단된 신시내티 레즈가 이듬해인 1876년 설립된 내셔널 리그 산하에 편입됨으로써 다시금 이곳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팀 역시 1880년에 해체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가 내셔널 리그의 규칙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셔널 리그의 규칙에 따르면 구장에서 술을 팔 수 없었으며 일요일에는 경기 개최 없이 구장을 폐쇄해야 했는데, 이를 레즈가 어겨서 '해체'라는 무시무시한 철퇴를 맞았던 것이다. 두 번이나 프로팀이 없어진 신시내티에 세 번째 프로팀이 창단된 시기는 1881년. 이 팀의 명칭은 신시내티의 첫 번째 프로팀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였다. 당시 내셔널 리그의 강력한 대항마였던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산하팀으로 1882년부터 본격적으로 야구팀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으며, 1890년 그 명칭을 레즈로 바꾼 후 브루클린 브라이드그룸스와 함께 내셔널 리그로 옮긴 이래 지금까지 내셔널 리그의 산하팀으로 활동해 오고 있다. 즉 오늘날 존재하는 신시내티 레즈는 신시내티의 세 번째 프로팀이자 두 번째 레즈임과 동시에 두 번째 레드스타킹스의 후신인 것이다. 이상의 과정을 살펴보면 최초의 프로팀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의 '적통' 자체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으며, 그 유산을 이어받은 구단과 관련해서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의 후신격이 된다. 괜히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이 구단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팀으로 공인한 것이 아니다. 최초의 10인 중 찰리 굴드, 찰리 스웨지, 앤디 러나드, 칼 맥베이만이 1875년 창단된 신시내티의 두 번째 프로팀 '신시내티 레즈'에서 뛴 적이 있을 뿐, 오늘날 존재하는 신시내티 레즈의 직계 조상인 신시내티의 세 번째 프로팀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 소속으로 뛴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최초의 프로팀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와 오늘날 존재하는 '신시내티 레즈' 간에는 단지 연고지가 신시내티라는 점만 같을 뿐 역사와 창단 당시의 선수 구성 등 기타 모든 면에서 서로 완벽히 다른 팀인 것이다. 어쨌든 최초의 프로야구팀이 탄생한 도시답게 이곳의 연고 구단인 신시내티 레즈는 최초로 야간 경기를 치른 팀. 최초로 비행기로 이동한 팀, 최초로 캡틴의 유니폼에 'C' 마크를 부착한 팀 등 여러 가지를 수식을 만들어 냈다. 1980년대까지는 직전 해의 성적에 상관없이 무조건 개막 경기를 홈에서 치르며, 항상 해당 시즌의 전체 개막전을 치르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1919년 블랙삭스 스캔들에 힘입어 우승한 팀이기도 하며, 역대 성적은 9번의 리그 우승과 5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이 있다. 2010년 9월 28일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우승을 확정 지어 15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2010년 내셔널리그 MVP 수상자인 조이 보토는 같은 지구 선수였던 알버트 푸홀스와 비교되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유망주 시절 평가는 팀동료 제이 브루스가 훨씬 좋았지만 브루스 역시 우익수로서 파워를 과시하며 함께 강력한 좌타 라인을 구축했다. 2011년에는 보토의 여전한 활약으로 경쟁력이 있었으나 다른 타자들의 침묵, 투수들의 난조 등으로 지구 중위권에 머물렀다. 알버트 푸홀스가 떠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프린스 필더가 떠난 밀워키 브루어스를 상대로 2012년에 승부를 걸어볼 심산인지 자케티 단장은 맷 레이토스, 션 마셜, 라이언 매드슨 등 투수력을 대폭 보강했다. 이에 새로운 남자의 팀으로 등극했다. 그런데 정작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매드슨이 토미 존 서저리로 시즌아웃 판정을 받아버리는 등 험난한 행보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아롤디스 채프먼이 불펜으로 복귀하여 마무리 자리를 꿰차면서 매드슨의 공백은 메꿔졌고, 조이 보토는 장기계약을 맺은 기념으로 MVP급의 화려한 비율스탯을 자랑하며 팀 공격을 주도했다. 다만 같은 중부지구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이끄는 앤드류 맥커친이란 의외의 복병이 나타나는 바람에 전반기까지 중부지구 선두 피츠버그에 1경기 뒤진 2위에 머물렀지만 이내 다른 팀들의 부진과 중심타자 보토가 부상으로 이탈한 후에도 팀은 상승세를 타며 압도적으로 중부지구 우승을 차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토드 프레이저, 잭 코자트 같은 신예선수의 깜짝 활약과 보토의 공백을 메운 라이언 루드윅, 제이 브루스 등의 분전도 있었지만 우승의 가장 큰 원동력은 자니 쿠에토의 사이영급 퍼포먼스를 비롯, 브론슨 아로요, 맷 레이토스, 호머 베일리, 마이크 리크의 5인 로테이션이 개막전부터 시즌 종료시점까지 등판을 거르는 일없이 전부 30경기 이상을 책임져준 강력한 선발진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19 시즌 때는 선발 투수진을 그나마 지탱해 주던 맷 하비는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로 떠났다. 12월 22일(한국시간), LA 다저스와의 트레이드가 발표됐는데, 호머 베일리와 유망주인 지터 다운스 그리고 조시아 그레이를 주고 맷켐프, 야시엘 푸이그, 알렉스 우드에 포수 유망주 카일 파머를 데려왔다. 2020 시즌 때의 시즌성적은 31승 29패로 거의 딱 5할을 기록,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와일드카드전 상대인 애틀랜타를 상대로 1차전은 트레버 바우어가 7.2이닝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타선이 11안타 4 사사구를 기록했음에도 득점권에서 12타수 1안타에 그치며 경기는 연장으로 흘러갔고, 13회에 프레디 프리먼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으며 패배했다. 2차전 역시 루이스 카스티요가 분투했지만 타선이 이날 경기도 무득점을 기록하며 무기력하게 패배, 허무하게 가을야구를 마감했다.
신시내티 레즈 구단의 개요
신시내티를 연고로 하는 내셔널 리그 중부 지구 소속의 MLB의 프로야구단으로 팀명인 레즈는 초창기 팀명 '레드 스타킹즈'를 줄인 것이다. 메이저리그 원년 팀이자 세계 최초의 프로야구팀이라는 장엄한 역사를 자랑한다. 덕분에 1980년대까지는 최초의 야구팀에 대한 예우로서 무조건 전년도 시즌 성적과 관계없이 홈에서 개막전을 치르며, 가장 먼저 개막전이 개최되는 특권을 누렸다. 국내에서는 2013년에 추신수가 뛰며 관심을 받았었다. 라이벌 팀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뉴욕 양키스, 클리블랜드 가디언즈 등이다. 클리블랜드 가디언즈와는 오하이오 주 지역 라이벌. 인터리그에서도 매년 붙는다. 오하이오 지역 라이벌치고는 두 팀 간의 선수 이동이 원활한 편이다. 2010년대만 보더라도 각 팀의 프런트라인급 선수인 추신수, 제이 브루스 등의 이동이 있었다. '빅 레드 머신' 시절에 자주 부딪혔던 팀들과 라이벌 관계인데 특히 다저스와는 1970년대 '블루 vs레드'의 두 상반되는 이미지로 경쟁했다. 그리고 다저스를 제치고 서부지구를 우승하면 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동부의 팀과 맞붙었고 두 팀이 중부지구로 배정된 1994년 이후로는 그 경쟁의식이 더 심화되어 2000년대에는 드래프트 1순위를 놓고, 2010년대는 와일드카드 시리즈 두 장을 놓고 치열하게 경합했다. 그 외에 월드 시리즈에서는 유독 양키스와의 만남이 많았고, 인터리그 매치업에서도 간간이 양키스와 맞붙었다. 2019년까지, MLB 30개 전 구단 중 일본인 선수를 한 번도 데려온 적 없는 유일한 팀이었다.(마이너리그 제외) 일본 선수들이 MLB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지 오래된 만큼 모든 구단이 일본인을 다 한 번씩은 영입해 보았는데, 역사가 깊은 구단이면서도 여태껏 일본인 선수가 한 번도 거쳐가지 않은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 물론 일본인 이외에 한국인은 3명이나 거쳐간 만큼 딱히 아시안에 대해 인종차별적인 것은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케이스라 볼 수 있다. 그러다 2019년 오프시즌에 아키야마 쇼고 포스팅에 성공 100년 역사상 첫 일본인 선수를 맞이한 구단이 되었다. 팀컬러가 빨간색이지만, 세인트 패트릭 데이처럼 특별한 날에는 녹색 유니폼을 입기도 한다. 이 팀의 구단주를 역임했던 마지 쇼트(1928~2004)는 팀의 역사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숱한 인종차별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흑인에 대한 온갖 비하 발언에서부터 흑인 직원을 무리하게 해고하면서 당한 논란, 일본인이나 아시아인이 쓸데없이 미국에서 업적을 쌓고 있다는 발언, 그리고 심각한 게 1996년 5월에 ESPN과 가진 인터뷰에서 난데없이 아돌프 히틀러 찬양 발언을 해버렸다. 당연히 미국에서도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녀는 부랴부랴 나는 나치에 동조하는 게 아니며 독일에 남은 사촌오빠들이 2차 대전 당시 강제징집당해 전쟁터에서 전사하였기에 그런 나치를 좋게 볼 수 없다 뭐다 변명을 해야 했지만 결국, 메이저리그 사무국에게 2만 5천 달러 벌금과 1년 직무정지형을 당해야 했다. 이로 인한 GM모터스로부터도 고소당해 소유했던 셰보레 딜러십을 팔아야 했다. 결국 이런 온갖 논란으로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의하여 1999년에 반강제적으로 6700만 달러에 팀을 팔았고 이후 2004년에 폐에 병이 생겨 세상을 떠났다. 이와는 별개로 그녀가 설립한 재단이 신시내티 대학교에 200만 달러를 기부받아 야구장을 짓고 마지 쇼트 스타디움이라 명명했는데, 2020년에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인한 반 인종차별 시위가 벌어지면서 이 야구장 역시 항의를 받았고, 결국 신시내티 대학 측은 야구장 이름을 수정하기로 함과 동시에 도서관 자료실에서도 마지 쇼트의 기록을 삭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사업가로서 재능이나 레즈 구단 역사에서 인재였으나, 저런 온갖 망언을 하도 많이 저지른 자업자득이었다.
신시내티 레즈 구단의 감독, 선수단
데이비드 벨은 전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야구선수이자 신시내티 레즈의 감독이다. 그의 선수생활은 1980년대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올스타 5회 골드글러브 6회 수상, 실버슬러거 1회 수상을 한 올스타 출신 버디 벨의 아들이다. 1995년 5월 4일에 메이저리그 데뷔했는데 그때는 짐토미의 대타 요원으로 뛰었다. 그리고 7월 28일 클리블랜드가 켄 힐을 받는 조건으로 페페 맥닐 릭 헤이서먼과 함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되었다. 1998년 클리블랜드로 다시 복귀해 4월 15일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했다. 그 이후 8월 31일 시애틀 매리너스에 트레이드되었는데 맞대 상가 조이 코라였다. 그때 좋은 활약을 보여 2001년 12월 재계약에 성공해 팀에 계속 남아있을 것 같았지만 2002년 1월 25일 데시 렐라포드를 받는 조건으로 샌프란시스코로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어 주전으로 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2002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우승 득점을 기록한 바 있고 월드시리즈에서는 제이티 스노의 파울타구에 배트보이가 맞을뻔했지만 홈플레이트를 지탱해 사고를 막은 선수였다. 그의 팀 동료와 코칭스태프가 투표해 리더십을 인정받아 시즌 후 윌리 맥 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필라델피아로 이적한 벨은 4년 1700만 달러 계약을 체결했다. 2004년 6월 20일에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해 할아버지 거스벨과 함께 기록해 할아버지 손자 조합이 되는 역사를 만들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마이너 리그 투수 윌프리도 라우레아노 반대급부로 트레이드되었다.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한 뒤 선수로써 은퇴했다. 2008년 10월 31일에 신티내티 레즈 더블 A팀 캐롤라이나 머드캐츠의 감독으로 3 시즌을 보냈다. 그 후 2011년 11월 트리플 A 팀 누이빌 배츠의 감독이 되었고 2012년 10월 23일 시카고 컵스 3루 코치에 선임되었다. 그 후 2013년 12월 17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타격코치가 되었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벤치코치를 역임했다가 2017년 10월 20일 팀을 떠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선수 개발 부사장이 되었다. 2018년 10월 21일 신시내티 레즈의 제63번째 감독이 되었다. 계약 기간은 3+1년이고 4년째 구단 옵션이 걸려있다. 2019년 4월 7일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전에서 크리스 아처, 데릭 다이트리치, 야시엘 푸이그, 아미르 개럿, 키오니 켈라, 펠리페 바스케스와의 벤치 클리어링 사건에서 퇴장당했다. 감독 역사상 처음으로 퇴장당한 경기였다. 그 사건 이후 한 경기 출장 정지를 받았다. 2019년 7월 30일 또 피츠버그전에서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되었는데 2019년 8월 1일에 항소를 못한 채 6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2021년 162경기에서 83승 79패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밀려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지만 와일드카드 경쟁을 끝까지 펼쳤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신시내티와 2년 계약 연장에 성공했다. 영구 결번 선수는 1. 프레드 허친슨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명투수 출신인 젊은 감독으로 1961년에 팀을 월드시리즈에 올려놓는 등 명장으로 가는 도중, 폐암으로 겨우 45세였던 1965년에 타계했다. 이를 기려 영구결번. 이후 허친슨을 기려 불굴의 정신력과 투혼을 보여주는 선수들에게 허치 상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5. 자니 벤치 : 1970년대를 대표하는 명 포수이자, 빅 레드 머신의 주축 선수.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포수 중에 가장 높은 득표율로 입성한 선수이기도 하다. 또한, 현재는 벤치의 결번이지만, 1940~1942년에는 우울증으로 자살한 비운의 포수 윌러드 허시버거의 영구결번이기도 했다. 8. 조 모건 : 1970년대 빅 레드 머신의 리더. 역대 최고의 2루수 중 한 명. 빅 레드 머신의 상징적인 인물로서 1970년대 팀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 ESPN의 선데이 나잇 베이스볼을 중계한 해설위원으로도 유명하다. 10. 스파키 앤더슨: 1970년대 빅 레드 머신의 감독으로 팀 최고의 전성기를 지휘한 명장. 11. 배리 라킨: 어릴 때부터 동경해 온 고향팀 신시내티 레즈에서만 19년을 뛰면서 빅 레드 머신 시대 이후의 신시내티를 이끌었던 팀의 리더이자, 1990년대 내셔널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유격수. 2012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면서, 2012년 8월 25일 영구결번되었다. 13. 데이브 콘셉시온: 1970년대 빅 레드 머신의 주장이자 유격수로 맹활약한 선수. 9번의 올스타에 뽑힐 정도로 인기도 좋았고, 5번의 골드글러브에서 알 수 있듯이 수비력도 좋았던 선수. 14. 피트 로즈 : 1963년 데뷔 이후 1978년까지 19 시즌을 뛰었고 타출장 0.307 / 0.379 / 0.425 에다가 통산 4,256안타 152 홈런 1,036타점을 기록했다. 여러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신인왕 출신에, 신시내티 유니폼을 입고 12차례 올스타(1965, 1967-1971, 1973-1978)에 뽑혔다. 1973년에는 MVP에 선정됐다. 그러나 1989년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팀 경기에 베팅을 한 것이 걸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영구 제명된 것뿐만 아니라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은 첫턴에 100% 입성할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후보 자격마저도 박탈되었다. 커미셔너의 강경한 입장과 미국 내 여론 때문에 구단에서도 제명된 이후 구단과의 관계도 끝난 줄 알았으나 2015년 신시내티 레즈 팬들이 선정한 '프랜차이즈 4'에 뽑히며 팬들의 지지가 보이자 구단에서 2016년 구단 명예의 전당과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18. 테드 클루스제프스키 : 1950년대 신시내티를 이끈 강타자로서 4번의 올스타와 1번의 홈런왕에 선정되었었다. 영구결번이 되기에는 전성기가 너무 짧았으나 타격 코치로서 1970년대 신시내티 최고의 전성기를 창조해 낸 공로로 영구결번되었다. 20. 프랭크 로빈슨 :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전성기 주역이었지만, 그전에 신시내티에서도 최고의 활약을 펼쳤기 때문에 영구결번. 다만, 신시내티에서는 버림받았기 때문에 볼티모어의 레전드로 더 기억된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 24. 토니 페레즈 : 1970년대 빅 레드 머신의 1루수.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1루 수다. 쿠바 국적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선수. 42. 재키 로빈슨 : 전 구단 영구결번. 웨이트 호이트 : 베테랑 위원회의 추천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1920년대 뉴욕 양키스에서 전성기를 보냈던 투수다. 뉴욕 자이언츠에서 데뷔했지만 곧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 됐고, 약간의 가능성을 내보인 뒤 에이스급 투수 마이크 맥날리, 올스타급 포수 월리 섕 등과 함께 뉴욕 양키스로 옮겨갔고 그 이전에 같은 팀에서 트레이드되었던 베이브 루스와 함께 1920년대를 지배하며 그곳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30대 이후 기량이 떨어졌다는 판단 하에 살인타선의 일원이던 쾨니히와 함께 트레이드된 뒤 이후 거의 매년 트레이드되었다. 은퇴 후 신시내티의 라디오 해설자로 1942년부터 1965년까지 활동했다. 현역 선수들 중 가장 영구 결번될 확률이 높은 선수는 선수 생활 전체를 한 팀에서 보내고 있는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출루왕 조이 보토(19번)이다. 역대 한국인 선수로는 봉중근 - 31번, 투수, 2004년, 김선우 - 64번, 투수, 2006년, 추신수 - 17번, 외야수, 2013년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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