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메츠 구단의 역사
뉴욕 메츠는 미국 뉴욕 퀸스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 야구팀이다.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소속이다. 1962년 뉴욕에서 창단되었다. 당초 뉴욕에는 뉴욕 양키스와 브루클린 다저스, 뉴욕 자이언츠 모두 세 개의 야구팀이 존재했으나 1958년에 다저스와 자이언츠가 서부로 떠나버렸고 뉴욕엔 양키스 혼자 남게 된다. 미국을 상징하는 도시이자 야구의 발상지로 여겨지기도 하는 뉴욕 같은 대도시에 유서 깊은 내셔널 리그 팀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인사들이 팀 창단을 계획했다. 이때 팀 창단에 앞장선 사람이 윌리엄 셰이라는 변호사로 메츠가 창단되고, 새 구장을 갖게 되자 홈구장 이름을 셰이 스타디움이라 명명하는 것으로 그의 공적을 기렸다. 1960년대 브랜치 리키가 주도한 제3의 리그인 컨티넨탈 리그의 출범 계획에 뉴욕의 신생팀 창단이 있었지만, 이 새 리그 출범은 메이저리그의 저지로 무산된다. 하지만, 새 구단에 대한 수요를 언제까지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행된 1962년의 메이저리그 확장드래프트에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제2기 워싱턴 세네터즈, 휴스턴 콜트 포티파이브즈와 더불어 프랜차이즈를 획득해 창단했다. 초대 구단주는 조앤 쉽맨 페이슨이었다. 팀 명은 '대도시 사람들'이라는 뜻의 'Metropolitans'에서 줄여서 Mets로 결정. 자이언츠와 다저스의 뉴욕을 대표하던 두 내셔널리그 팀의 전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팀의 상징색은 자이언츠의 주황색과 다저스의 파란색으로 결정. 대체적인 분위기나 역사의식은 다저스에 가까운 편이다. 브루클린 시절을 기억하는 다저스 팬들은 다저스 대신에 메츠를 응원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도 브루클린 옆에 퀸스가 있어 찾아가기도 쉽다. 창단 초창기 최약체였던 전력이었지만뉴욕 양키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감독 케이시 스텡겔을 영입해서 차근차근 팀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 목표였으나.... 스텡겔 감독은 너무 늙은 데다가 팀에는 너무 어리고 경험 없고 실력미달인 선수들만 가득했다. 뉴욕 언론들은 메츠를 '스텡겔의 유치원'이라고 불렀고 스텡겔 감독의 메츠는 4 시즌 연속 꼴찌 및 세 자릿수 패배를 기록했다. 단, 흥행은 정말 대단했다. 그 형편없는 성적에도 꾸준히 관중들이 찾아줬다고. 이유는 하나. 양키스를 진짜 싫어하는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메츠를 응원했다. 메츠 창단 전에는 아예 보스턴 레드삭스를 응원했을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단 연도의 메츠 성적은 내놓기도 뭐 한 수준이었다. 창단 첫해 성적이 40승 120패였는데 이는 20세기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최다패배 기록이었고 승률. 250 역시 1935년 보스턴 브레이브스가 기록했던 승률. 248보다 약간 높은 수치였을 정도였다. 이러던 와중에 1966년 전체 1번으로 뽑은 스티브 칠콧은 두 가지 이유로 레전설이 되었는데, 첫 번째 이유는 그는 역대 최초로 전체 1번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지 못하는 불명예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로는, 전체 2번으로 뽑힌 선수는 다름 아닌 명예의 전당 첫 턴 입성자 레지 잭슨이었다. 메츠에게도 서광이 비추기 시작하였으니 바로 1967 시즌 내셔널리그 신인왕이자 훗날 311승을 올리게 되면서 98.8%라는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 최고 득표율 선수가 되는 톰 시버의 등장이 바로 그것. 1966년에는 또 다른 대투수 놀란 라이언도 19세의 나이로 데뷔하지만.... 놀란 라이언은 메츠에서는 별 특출 난 것 없는 투수에 불과했고 그가 대투수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1972 시즌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이적하면서부터이니 일단 논외. 아무튼 톰 시버는 22살인 데뷔시즌에 251이닝을 소화하면서 16승 13패 2.76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신인치고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찍어주면서 혜성과도 같이 등장했다. 투수 친화적인 홈구장인 셰이 스타디움의 특성을 감안하여 팀도 톰 시버를 주축으로 좋은 투수들 위주로 팀 전력을 강화한다는 작전을 세운다. 그리고 1969년, 주전 야수들 전원이 20대이고 투수진에서도 두 명 빼고 죄다 20대라는 엄청나게 젊고 역동적인 선수들을 앞세운 메츠는 창단최초의 100승이자 창단최초의 지구우승을 차지하면서 창단 이후 최초의 포스트시즌에 진출한다.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간단히 스윕하고 월드시리즈에 올라가 만난 팀은 훗날 586개의 홈런을 치게 되는 프랭크 로빈슨, 역사상 최고의 공수겸장 3루수 브룩스 로빈슨, 23승과 20승을 올린 원투펀치 마이크 퀘이야 - 데이브 맥널리를 앞세운 당대 최강팀 볼티모어 오리올스였다. 모두들 볼티모어의 우세를 점쳤지만 메츠는 의외로 간단히 볼티모어를 4승 1패로 꺾고 1969년 창단 후 7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루는 쾌거와 동시에 '어메이징 메츠'라는 명칭을 얻는다. 이 당시 시카고 컵스와의 1위 다툼은 그야말로 치열했었다. 심지어 컵스는 한때 메츠에 14경기차로 앞서고 있던 때도 있었다. 더구나 시즌 중반 컵스가 메츠에게 9경기차로 앞서고 있었기도 했다. 그러나 시즌 마지막 48경기 가운데 메츠가 37경기를 이기는 동안, 컵스는 무려 20승 28패라는 처참한 몰락을 기록하면서 시즌 내내 지키고 있던 1위 자리를 내주는 비극을 연출했고 메츠는 창단 7년 만에 월드시리즈 진출이라는 경사를 맛봤다. 첫 우승 이후에도 꾸준한 투자와 선수들의 분발이 있었으나 이상하리만큼 성적은 따라주지 않았다. 1973년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한 번 차지한 것 외에는 전부 중하위권에서 맴돌았다. 에이스인 톰 시버는 1968년부터 1976년까지 평균 274이닝씩을 소화하며 제일 적게 던진 게 1974년 엉덩이 부상으로 인한 236이닝이라는 진짜 말이 안 나올 정도의 무시무시한 이닝을 소화하면서 그야말로 팔이 빠져라 던져댔지만 팀 성적은 신통찮았고 결국 1977 시즌 도중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됐다. 당연히 팀성적도 스타도 별 볼 것 없는 팀으로 다시 쪼그라들었다. 이후 톰 시버는 1983 시즌 다시 메츠로 돌아와 한 시즌 소화하지만 231이닝 3.55라는 준수한 이닝과 평균자책점에도 팀 타선이 워낙 막장이라 9승밖에 못 챙긴다. 한 시즌만 뛰고 다시 메츠를 떠나야 했고 이후 1986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은퇴한다. 그 사이 조앤 구단주는 1975년에 사망했고, 이후 남편 찰스가 팀을 이어받았다가 1980년에 출판사 '더블데이 사' CEO 넬슨 더블데이와 부동산업자 프레드 윌폰에게 지분을 팔았다.
뉴욕 메츠 구단의 개요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소속으로 연고지는 뉴욕이고 팀명인 Mets는 Metropolitans의 준말이다. 같은 연고지인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는 서브웨이 시리즈라 불린다. 팀 전체 역사는 그리 길지도 않고 강팀이었던 적도 드물었으나, '어메이징 메츠'라는 별명이 붙었을 만큼 포스트시즌에 강했었던 팀이었다. 뉴욕 메츠에는 몇 가지 웃지 못할 기록들이 있다. 1986년 우승 이후 36년째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함께 퍼펙트게임을 달성하지 못한 유이한 팀이다. 내셔널 리그 동부지구 팀 중 21세기에 우승을 못한 유일의 팀이다. 단일 시즌 100승을 넘게 하고도 와일드카드에서 탈락한 최초의 팀이다. 라이벌은 역시 뉴욕을 같이 쓰는 뉴욕 양키스이지만 메츠가 커리어적인 요소에서 너무 저조하다. 당장 우승 횟수만 해도 27 vs2. 하지만 양키스의 성적 하락 때문에 최근엔 라이벌로 인정해 주는 편이다. 당장 2000년 월드시리즈만 해도 1956년 양키스와 다저스와의 서브웨이 시리즈 이후 44년 만에 서브웨이 시리즈여서 뉴욕 전체가 난리였다. 게다가 물론 1980년대 한정이긴 하지만 뉴욕 양키스보다 월등한 성적을 내는 등 나름대로 뉴욕에서 선전했다고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2022년을 기점으로는 악의 제국들의 투자 전쟁과 함께 서브웨이 시리즈가 인터리그 최대의 라이벌리로 부각되었다.
또한 90년대 내내 메츠의 앞길을 막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라이벌로 꼽힌다. 이후 2022 시즌 또다시 지구 우승을 놓고 경쟁, 처음에는 메츠가 치고 올라가다가 메츠가 DTD 하는 동안 애틀랜타가 갑자기 치고 올라오며 우승, 메츠는 시즌의 90% 가까이 기간 동안 1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등을 기록하게 된다. 2007년과 2008년의 대참사 이후부턴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급격히 주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신천지를 찾아 서부로 떠난 과거 하며 미국에서 1, 2위를 다투는 대도시인 뉴욕 vs 로스앤젤레스라는 구도에도 불구하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는 그다지 라이벌 플래그가 서 있지 않은 것도 신기하다. 그리고 전통적으로도 두 팀의 선수 트레이드가 잘 이뤄지는 편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원조 NL 최대의 부자 팀 다저스와 MLB 최대의 투자광 스티브 코헨의 메츠가 2022년을 기점으로 다시 라이벌리를 형성하고 있다. 2014년 이후로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패배에 허덕이면서 길고 긴 리빌딩을 시작하고 워싱턴 내셔널스는 팜 유망주인 브라이스 하퍼와 스티븐 스트라스버그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대권에 도전하게 되면서 언제나 정상을 노리던 워싱턴 내셔널스와 라이벌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게다가 메츠가 NL 1위의 성적으로 가을야구에 진출하게 되고 2015년에는 비록 2위를 하였지만 상반기까지 우승 후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무시 못할 수준까지 올라왔다. 같은 지구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필라델피아 필리스 두 팀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서로 상대하는 한 경기 한 경기가 순위 결정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두 팀은 전력을 다해 싸우고 팬들도 긴장감을 갖고 지켜보게 되었다. 양키스, 브레이브스, 내셔널스, 필리스 등과 라이벌 플래그가 서있으나, 양키스와는 체급 차이가 나기도 하고, 양키스는 레드삭스를 항상 신경 쓰기 때문에 화이트삭스 VS 컵스만큼 불꽃 튀는 관계는 아니다. 브레이브스는 90년대의 팀이라 불릴 정도로 지구 내에서 장기집권을 이루었던 강팀이라 공공의 적 느낌이 강하고, 내셔널스 역시 연고이전으로 메갈로폴리스 지역에 합류했으나, 아직 고정적인 라이벌리가 형성될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르진 않았다. 현지에서도, 양키스 VS 레드삭스 라이벌리와 더불어 동부지역 최고의 라이벌리로 메츠 VS 필리스를 꼽고 있다.
뉴욕 메츠 구단의 감독과 영구결번, 한국 선수들
뉴욕 메츠의 감독은 윌리엄 내새니얼 "벅" 쇼월터 3세이다. 통산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3번 내셔널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1번 총 4번 수상한 명감독으로, 특히나 암흑기에서 탈출시키는 데에는 도가 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에서 다소 실책을 하는 편인지라 우승복은 없어서 양키스와 애리조나 감독 시절 모두 그가 감독에서 물러난 바로 다음 해에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한국 선수와도 꽤나 인연이 깊은데 애리조나에서는 김병현, 텍사스에서는 박찬호를 지도했으며 볼티모어에서 김현수와 한솥밥을 먹었다. 2021년 12월 18일, 뉴욕 메츠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는 것이 구단주 스티븐 코헨의 트위터를 통해 발표되었다. 팀의 기강을 잡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베테랑 감독이니만큼 지난 시즌 완전히 와해되었던 팀 케미스트리를 복원시키기 위한 결단으로 보인다. 그리고 메츠 오너 일가의 기대대로 팀 내 불화를 진압하고, 개막전부터 동부지구 선두를 독주하고 있었으나 10.5 게임차를 브레이브스에게 다 따라 잡힌 것도 모자라, 결국 10월 2일 자로 맞대결에서 당하면서 2위로 추락하며 와일드카드 획득에 만족하고 말았다. 와일드카드 시리즈에서는 샌디에이고와 시리즈 1:1인 가운데 3차전에서 팀이 끌려가고 상대 선발 조 머스그로브가 호투하자 귀에 이물질을 바른 거 아니냐고 심판에게 이의를 제기하여 분위기를 반전시키려고 했으나 오히려 머스그로브를 비롯한 샌디에이고를 분기탱천하게 만들어 상황은 더욱 어려워져 결국 6:0을 당해 이번에도 월드 시리즈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도 팀의 위기를 잘 수습해 정규시즌 100승 팀으로 만든 성과를 인정받아 내셔널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2014년 이후 8년 만이자 개인 통산 4번째 수상으로 바비 콕스, 토니 라루사와 최다 수상 타이기록을 세웠다. 영구결번은 14. 길 호지스 : 선수로는 메츠에서 딱 1년 뛰었을 뿐이고, 감독으로 더 명성을 얻었다. 1969년 첫 우승 당시 감독. 17. 키스 에르난데스 : 1984~1989년까지 뉴욕 메츠에서 뛴 1루수로 1986년 월드 시리즈 우승 멤버이자 1980년대를 대표하는 1루수 중 한 명이었다. 24. 윌리 메이스 :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 역사상 최고의 플레이어이다. 통산 660 홈런 3283안타 1903타점, 24번의 올스타 선발, 12번의 골드글러브, 2번의 리그 MVP(1954, 1965). 도루 실력도 빼어났지만, 당시에는 도루를 많이 못하게 하던 시절이라 600 홈런 - 300 도루 달성으로 만족해야 했다. 인품도 훌륭해서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다정다감했으며, 뉴욕 시절에는 할렘가에서 동네 꼬마들과 나무 막대기로 공을 치면서 같이 시간을 보내주기도 했을 정도로 소탈하다. 뉴욕 메츠에서는 2년밖에 뛰지 않았지만, 뉴욕 자이언츠를 상징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영구결번을 준 것으로 보인다. 31. 마이크 피아자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대 최고의 공격형 포수로 불릴 만큼 공격력이 뛰어났고 박찬호와 관련해서 국내에서도 유명했다. LA 다저스에서 전성기를 맞고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메츠에서 8 시즌을 뛰는 내내 등번호로 31번을 사용했다. 메츠를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아무도 등번호를 사용하지 않았고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를 떠나 영구결번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결국 2016년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83%를 득표하여 헌액 되었고 2016년 7월 31일 영구결번식이 열렸다. 36. 제리 쿠스 먼 : 메츠에서 통산 140승을 올린 역대 메츠 좌완 최다승 투수로, 톰 시버와 함께 메츠의 초창기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다. 37. 케이시 스텡겔 : 뉴욕 양키스에서 더 명성을 얻은 감독이지만, 창단 초기의 고생한 것에 대한 보답인 듯. 메츠에서도 영구결번되었다. 41. 톰 시버 : 통산 311승을 자랑하는 메츠 역사상 최고의 투수이자 투타 통틀어서 최고의 선수이다. 별명부터가 '더 프랜차이즈'이다. 메츠 첫 우승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가장 고평가 받으며, 아예 메츠에만 한정 짓지 않고 라이브볼 투수들 중 역대 최고 반열에 놓아도 가뿐히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투수였다. 이를 증명하듯 명예의 전당 입성 당시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2016년 켄 그리피 주니어의 99.3%에 의해 깨졌고 현재는 만장일치로 들어간 분이 나왔다. 42. 재키 로빈슨 : 전 구단 영구결번. 생전의 로빈슨은 다저스의 연고 이전을 강력하게 반대했던지라 브루클린 다저스의 역사를 이은 메츠와는 이런저런 소소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사후에도 등번호 42번이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되는 행사가 열린 곳이 셰이 스타디움이었을 정도로 여러 가지로 소소하게 엮여있다. 현재 데이비드 라이트의 5번은 2018년 은퇴 이후 아무도 달고 있지 않으며, 게리 카터의 8번은 명예의 전당 입성 이후 20년 이상 비공식 결번 상태이다. 클레이튼 커쇼와 함께 2010년대 최고의 임팩트를 보여준 투수인 제이콥 디그롬의 48번 역시 영구 결번 가능성이 있었다가 2023 시즌을 앞두고 텍사스 레인저스로 떠나면서 불투명해졌다. 역대 한국인 선수로는 서재응 - 38번/40번/26번, 투수, 2002년~2005년, 구대성 - 17번, 투수, 2005년, 박찬호 - 61번, 투수, 2007년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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