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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에인절스 구단의 역사, 개요, 감독 및 선수단 소개

by 결심도전 2023. 5. 15.

LA에인절스 구단의 모자 로고, 구단 로고

LA에인절스 구단의 역사 

동부 중심으로 내셔널 리그와 아메리칸 리그가 생겨나 흥행하던 야구판에서 미국의 제2 대도시인 LA에는 퍼시픽 코스트 리그 등을 비롯한 여러 야구리그가 존재했고, 1892년에 창단한 Los Angeles Angels는 PCL에 참가한 팀이었다. 그런데 내셔널 리그와 아메리칸 리그가 인기와 자금력을 바탕으로 승승장구 하면서 브랜치 리키의 주장을 통해 그 외의 작은 야구리그를 마이너 리그로 통합하면서 이 PCL 소속 LA 에인절스는 시카고 컵스의 마이너리그팀으로 계약을 맺었다. 홈구장 네이밍 권리까지 사서 "리글리 필드"라는 이름을 붙였고 컵스의 마이너리그로 활동하던 도중 당시 브루클린 다저스의 월터 오말리가 다저스의 LA 이전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컵스에게서 이 구단을 매입하면서 팀 이름 사용권까지 샀고, 이후 다저스가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이 팀은 워싱턴의 스포케인으로 연고를 옮긴다. 1961년, 구단 확장에 따라서 아메리칸 리그 서부지구 소속으로 로스앤젤레스를 연고지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라는 이름으로 창단하였으며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가 1941년 시즌 후 로스앤젤레스 이전설이 있었는데 만약 이렇게 됐다면 해당 구단과 팀명이 같았던 퍼시픽 코스트 리그 팀이 롱비치로 갈 예정이었다. 1965년, 팀 이름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바꾸었고, 1966년, 에인절 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이 개장되어 이곳으로 홈구장을 옮긴 이래, 지금까지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1977년에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단장 버지 버베이시를 모셔오며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고 전력이 안정되면서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1979년, 1982년, 1986년 3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 시기를 상징하는 선수가 바로 전설적인 투수 놀란 라이언. 올스타 유격수인 짐 프레고시 뉴욕 메츠로 보내는 대가로 넘어온 이 투수는 에인절스의 간판으로 성장하면서 팀을 여러 차례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그러나 세 번 모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패배했다. 1979년에는 1970년대를 주름잡은 강호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경험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패했다. 한 점차 승부가 두 차례 있었을 정도로 선전했지만, 1970년대를 지배한 이 강호와 대적하기에는 역시 경험의 차는 무시할 수 없었다. 1982년에는 레지 잭슨, 로드 커류, 바비 그리치 같은 베테랑 강타자들을 앞세워 플레이오프에 올랐지만 밀워키 브루어스에게 밀렸는데, 5전 3선승제인 리그 챔피언십에서 먼저 2승을 따내고도 내리 3연패하면서 탈락하였다. 그 이후 존재감 없는 팀이 된다. 중하위권에 맴돌면서 지구 최하위도 했지만 겨우 5할을 넘겨보면 와일드카드는 실패하는 식으로 90년대 내내 플레이오프에 발을 들여보지 못했다. 그 사이 팀을 위해 헌신했던 진 오트리 구단주는 1998년 타계했고, 소유권은 1996년부터 월트 디즈니 컴퍼니로 넘어갔으며 1997년 '애너하임 에인절스'로 팀 명칭을 바꾼다. 하지만 디즈니 사가 딱히 야구단에 돈을 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애너하임에 디즈니랜드를 세웠던 디즈니는 에인절스를 자기네 마케팅 상품으로 이용해먹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전통의 에인절스 유니폼을 갖다버리고는 새로운 디자인을 채용하기도 했다. 1986년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졌다. 이후에 15시즌 동안 승률 5할대 이상이 5번에 그칠 정도로 침체기였지만 16년 만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2002년 창설 42주년 만에 처음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97년 월트 디즈니가 소유권을 가지면서, 팀명이 다시 "애너하임 에인절스"로 변경되었다. 2005년에 아르테 모레노 구단주가 취임하면서, 팀명이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으로 변경되었다. 1997년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구단의 소유권을 가지던 시절, 야구장을 보수하면서 애너하임 시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팀명에 대한 명명권을 부여받았다. 이에 디즈니는 디즈니랜드가 있는 애너하임 시를 홍보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에서 '애너하임 에인절스'로 구단명을 바꾼다. 하지만 2005년 아르테 모레노 구단주가 취임하면서, 로스앤젤레스 지역까지 인기를 확대하기 위해 다시 팀의 이름에 로스앤젤레스를 포함시킨다. 그래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이 되었다.  그냥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로 바꿀 수도 있었는데 이 길고도 구차한 이름을 붙인 이유는 모레노 구단주가 구단을 인수하면서 "팀명에 애너하임을 빼지 말라"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디즈니의 욕심과 아르테 모레노가 이런 터무니없이 긴 이름을 만들어 버렸다. 만약 팀명에서 애너하임을 빼면 그 돈은 디즈니 사가 물어내야 한다. 그런데 2015시즌 종료 후, 구단 측은 공식 트위터와 페이스북, 공식 사이트 등에서 알게 모르게 '오브 애너하임'을 떼냈다. 그러나 2005년에 공식적으로 '오브 애너하임'을 달고 있을 때도 모든 이들이 팀을 그냥 'Angels', 'Angels Baseball'로 칭해 왔던데다가, 이 꼬릿말을 떼낸데 대한 구단의 공식적 발표도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매체는 여전히 '오브 애너하임'을 붙인 채 팀명을 표기했다. 그러다 2017년부터는 MLB 공식 사이트에서조차 '오브 애너하임' 없이 팀명을 표기하기 시작했다. 최소한 2017년 여름부터는 에인절스가 공표만 안 했다뿐이지 공식적으로 '오브 애너하임'을 뗐다고 인식하는 듯하다. 영문 위키피디아도 구단의 입장을 반영하여 '오브 애너하임'은 2015년까지만 정식 팀명인 것으로 표기했다. 2002년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후 7년 동안 5번의 지구 우승을 하며 강호로 떠올랐으나, 이후에는 매년 3~4위 정도만 기록하는 애매한 팀으로 유명해졌다. 현재는 최강의 선수인 오타니와 트라웃을 데리고 가을야구에 매년 실패하는 구단으로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게다가 구단이 FA 시장에는 투자를 하지만 선수 육성에는 등한시한 결과, 에인절스의 유망주 라인은 메이저 최악 수준이다. 만약 이대로라면 에인절스의 부진은 장기화 될 가능성이 높으며 그렇게 되면 구단의 인기도 떨어질 것이며 불투명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2022년 8월 23일 에인절스가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19년 만에 모레노가 구단 운영에서 손을 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23년 1월 23일 모레노가 구단 매각을 철회하여 에인절스 팬은 다시 절망하게 되었다. 모레노 본인은 '아직 우승 못 해봐서 꼭 우승 해보고 매각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맘에 드는 오퍼가 들어오지 않아서'라는 이유가 더 적절해 보인다. 모레노 구단주가 유망주 육성에 투자를 소홀히 하면서 코치들의 역량 및 의욕이 떨어졌고 분석 및 연구도 제대로 안된데다가 단장이 올때마다 운영 철학도 달라지는등 일관성이 없이 돌아가면서 선수 육성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미나시안이 단장으로 부임하고 나서는 점점 개선되고 있다고 한다. 오타니 쇼헤이가 FA가 되기 전 마지막 해이다. 2023년 1월 23일 구단주 모레노가 구단 매각을 철회했다. 에인절스 팬들의 반응은 당연히 절망적이였지만 이러니저러니해도 5월초 시점에서는 18승 14패로 5할 승률을 웃돌면서 비교적 순항중이다.아직 시즌 일정의 5분의 1밖에 안지났으니 과거 전적으로 인한 불신과 에인절스는 못한다라는 선입견을 지우기에는 좀 이르지만 작년 에인절스의 빈약한 타선은 확실히 강해졌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에인절스의 수비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쨌든 승수를 쌓고 있는 이유가 바로 경기 내용이 부실하고 수비 실책이 나와도 타선쪽에서 어떻게든 점수를 뽑아내기 때문이고 선발진도 준수한 편에 속한다.그래서 팬들은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LA에인절스 구단의 개요 

MLB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 소속 프로야구단으로 연고지는 로스앤젤레스이고 광역권의 소도시인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이다. 팀명은 대도시 로스앤젤레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현지에서의 별명은 '헤일로스'이며, 국내 팬들은 '천사네'라고 부른다. 여담으로 '에인절'은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영단어인데 엔젤스가 아닌 에인절스로 한국 내 명칭이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특이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서 "애너하임 에인절스"로 변경된 것은 월트 디즈니 사가 이 구단을 소유하게 되면서, 디즈니랜드가 있는 애너하임 시를 홍보하기 위해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아트레 모레노가 월트 디즈니로부터 에인절스를 사들인 뒤, 팀 명칭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미 월트 디즈니 사가 에인절스를 가지고 있었을 때부터 팀 명칭에 "애너하임"을 사용하기로 장기간 계약을 했었던 애너하임 시 당국은 모레노의 결정에 반발하여 팀 명칭을 두고 소송을 걸었으나, 결국 2009년 주 법원의 항소법원에서 패하여 모든 소송을 취하했다. 같은 로스앤젤레스 지역을 연고지로 하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는 시즌 중간에 치러지는 인터리그에서 자주 상대하게 되는데, 다저스의 홈구장인 다저스타디움과 에인절스의 홈구장인 에인절 스타디움 오브 애너하임을 로스앤젤레스 5번 고속도로를 통해 바로 이동할 수 있다 하여, 이 인터리그 경기들을 "프리웨이 시리즈"라 부른다. 한편, 같은 지구의 시애틀 매리너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텍사스 레인저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자주 붙게 되는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도 라이벌로 거론되고 있다.

LA에인절스 구단의 감독 및 선수단 

필립 조셉 "필" 네빈 :  미국의 전 야구선수이자 현 야구 지도자로서 현재는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의 감독을 맡고 있다.

캘리포니아 플라센티아에 있는 엘 도라도 고등학교에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89년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3라운드 전체 82순위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지명되었는데 10만 달러의 계약 보너스가 포함된 제안을 거절한 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풀러턴 캠퍼스 진학을 결정했다. 야구팀에서는 대학교 1학년 때 타율 0.358 56타점을 기록했다. 타이탄스는 콘퍼런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그해 1990년 칼리지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두 경기를 모두 지면서 준우승에 그쳤다. 2학년 때는 0.355의 고타율을 기록했다. 이듬해 0.391의 타율 20개의 홈런 71개의 타점을 기록해 빅 웨스트 콘퍼런스 트리플 크리운을 수상했다. 대학 야구 및 올해의 대학 선수로 선정되었다. 대학 통산 3 시즌 39 홈런 184타점으로 0.364의 타율을 기록했다. 이 같은 활약을 바탕으로 국내 최고의 아마추어 선수에게 주어지는 골든 스파이크 어워드를 수상했다. 1992년 메이저리그 전체 1순위로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지명되었는데 그 당시 휴스턴 스카우트였던 할 뉴하우저는 드래프트 전에 데릭 지터를 좋게 평가해 지터를 뽑을 것이라 밝혔으나 팀에서 네빈을 데려가기로 한 결정에 항의해 사임했다. 1993 시즌 전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유망주 30위로 선정된 기쁨도 잠시, 휴스턴 구단에서 더블 A 텍사스 리그의 잭슨 제너럴스로 보내 그의 프로 경력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했다. 휴스턴 스프링캠프에서 0.350의 타율을 보여주었는데 휴스턴의 멤버구성이 루이스 곤잘레스, 스티브 핀리 및 에릭 안토니의 좌타자 위주라 우타자 보강을 위해 개막에 맞추어 메이저리그로 승격할 수 있게 무게를 두었는데 켄 캐미니티가 선발 3루수로 뛰면서 네빈은 수비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휴스턴 구단은 마이너리그팀 감독인 릭 스위트에게 좌익수로 네빈을 전향시키라고 요청했고 짐 린데만이 네빈의 멘토 역할을 해주어 상당한 관심과 압박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왔다. 시즌 타율 0.247로 낮았지만 득점권 타율 0.309 49타점을 기록했고, 수비에서 좌익수로 7월까지 실책 없이 10번의 선발 출전했다. 2000 시즌에는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는데. 916의 OPS와 31 홈런을 기록했다. 2001년에는 126타점과 41 홈런,. 976의 OPS를 기록해 내셔널 리그 올스타에도 선발되었다. 그러나 27개의 실책으로 메이저리그 3루수 최다 실책 1위, 전체 메이저리그 3루수 들 중 가장 낮은 수비율 (. 930)을 기록했다. 2006년 미네소타로 이적해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으나 디비전시리즈에서 3패를 당한 채 탈락해버리고 만다. 다음 시즌 초에 계약을 않은 채 2007년 5월 12일 은퇴를 발표했다. 12년간 1,217경기에서 208 홈런과 743타점으로 타율 0.270을 기록했다. 2008년에 감독으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그해 12월, 독립 골든 야구 리그(GBL)에서 오렌지 카운티 플라이어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플레이어스는 2009년 37승 39패로 5개 팀 GBL에서 4위를 기록했다. 2022 시즌에는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의 3루 코치가 되었다. 이후 6월 7일, 성적 부진을 이유로 조 매든 감독이 경질되면서 공석이 된 에인절스의 감독대행이 되었다. 6월 10일 보스턴전에서 오타니 쇼헤이의 투타 활약을 앞세워 14연패 탈출에 성공했다. 2022 시즌 종료를 앞두고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와 1년 계약을 맺어 정식감독이 되었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선수들 중, 에인절스에서 활약한 선수들은 아래와 같다. 호이트 윌헬름 (투수, 1969년 / 1985년 헌액) 143승 122패 , 놀란 라이언 (투수, 1972년 ~ 1979년 / 1999년 헌액) 324승 292패 , 프랭크 로빈슨 (외야수, 1973년 ~ 1974년/1982년 헌액) 2808경기 출장, 타율. 294, 1812타점 , 딕 윌리엄스 (감독, 1974년 ~ 1976년/2008년 헌액) 감독 통산 1571승 1451패 , 로드 커류 (내야수, 1979년 ~ 1985년/1991년 헌액) 2469경기 출장, 타율. 328, 1015타점 , 레지 잭슨 (외야수, 1982년 ~ 1986년/1993년 헌액) 2820경기 출장, 타율. 262, 1702타점 , 돈 서턴 (투수, 1985년 ~ 1987년/1998년 헌액) 324승 256패 , 데이브 윈필드 (외야수, 1990년 ~ 1991년/2001년 헌액) 2973경기출장, 타율. 283, 1833타점 , 에디 머레이 (1루수, 1997년/2003년 헌액) 3026경기출장, 타율. 287, 1917타점 , 리키 헨더슨 (외야수, 1997년/2009년 헌액) 3081경기출장, 타율. 279, 1115타점 , 블라디미르 게레로 (외야수, 2004~2009/2018년 헌액) 2147경기출장, 타율. 318, 1496타점 , 영구 결번은 11 : 짐 프레고시 (1961-1971 유격수, 1978-1981 감독, 1998) , 26 : 진 오트리 (구단 설립자, 초대 구단주, 1992년 영구 결번 지정) , 29 : 로드 커류 (1979-1985 1루수, 1992-1999 코치, 1991) , 30 : 놀런 라이언 (1972-1979 투수, 1992) , 42 : 재키 로빈슨 (흑인최초 메이저리거, 인종차별 철폐에 기여, 1997년 MLB 전구단 영구 결번) , 50 : 지미 리즈 (1972-1994 코치, 1995) , 27 : 블라디미르 게레로 (2004 - 2009 외야수, 2018)  11. 짐 프레고시 : 1960년대 초창기 LA 에인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유격수로 올스타에 6번 선정되었다. 1978년에는 감독으로 복귀해 1979년 팀의 지구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26. 진 오트리 : 팀의 설립자. 영화배우 출신으로 팀에 대한 애정이 많았던 구단주. 안타깝게도 우승을 못 보고 1998년 타계했는데, 2002년 첫 우승 당시 우승트로피를 수여할 때, 버드 셀릭 커미셔너가 한 첫마디가 "하늘에 있는 진 오트리도 좋아할 것."이었다. 번호가 26번인 이유는, ML 로스터 정원은 당시 25명이었는데, 그가 팀의 '26번째 선수'라는 의미에서이다. 팀당 11명이 경기장에 나서는 축구에서, 여러 축구팀이 팬들을 기념하며 열두 번째 선수라는 뜻으로 12번을 영구결번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29. 로드 커류 : 미네소타 트윈스에서도 스타지만, 여기서도 스타. 2루수와 1루수를 맡으면서 통산 3053안타, 통산 타율 0.328에 빛나는 전설적인 교타자이다. 당시 세이버매트릭스가 없던 시절 훌륭한 타자의 기준이던 3할을 꾸준히 쳤기에 좋은 타자라는 평가를 받았고, 베테랑다운 리더십으로 80년대 초 에인절스의 부흥기를 이끈 주축 중 한 명이었기에 인기는 대단했고, 통산 3000안타의 대기록을 에인절스에서 달성했다. 양 팀 합쳐서 올스타만 18번 선정된 스타플레이어. 30. 놀란 라이언 : 뉴욕 메츠에서 별 볼일 없던 선수였던 놀란 라이언은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서 비로소 최강의 투수로 성장하여 팀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거듭난다. 참고로 휴스턴 애스트로스 텍사스 레인저스에서도 영구결번되어 재키 로빈슨을 빼면 프랭크 로빈슨과 함께 3개 팀에서 영구결번되는 기록을 세웠다. 42. 재키 로빈슨 : 전 구단 영구결번. 50. 지미 리즈 : 선수로도, 코치로도 딱히 특기할 만한 경력은 없는 인물. 메이저리그 커리어는 1930~31년 양키스(142경기), 1932년 세인트루이스(90경기)가 전부이며, 포지션은 2루수였다. 그의 진가는 노년에 드러나는데, 1972년, 71세의 리즈는 에인절스에 구직 신청을 했고, 선수들의 컨디션 관리 코치로 고용됐다. 하지만 그의 특기는 펑고 쳐 주기였다. 그는 직접 만든 펑고 배트를 썼는데, 선수들은 그가 원하는 곳 어디로든 펑고를 날려 보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심지어는 타자들 타격 연습 때 마운드에서 손으로 공을 던지는 대신 펑고로 공을 날려 주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팀에서 무려 22년 동안 묵묵히 일을 수행했고, 지병인 폐렴이 악화되어 1994년에 93세의 나이로 타계하자, 이듬해 팀은 곧바로 그의 헌신을 기려 영구결번. 에인절스 명예의 전당에도 당연히 올라 있다. 현재 영구 결번이 가장 유력한 번호는 당연히 27번이다. 정황상 트라웃이 은퇴하고 난 뒤 게레로와 공동 영결할 가능성이 높다. 이 밖에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2002년 팀 우승의 주역인 팀 새먼이 쓰던 15번은 공식적인 영구 결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달지 않는다. 15번은 에인절스 팬이라면 누구나 영구결번 될 거라고 믿고 있지만 팀 새먼이 팀과 관계가 나쁘지 않은데도 10년 넘게 영구결번 확정이 되지 않은 것은 의아한 점. 15번은 2010년에 디백스에서 댄 해런이 트레이드되어 왔을 때, 원래 15번을 달았던 해런은 24번으로 등번호를 바꿨다. 또한, 팀의 기대주로 주목받았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한 닉 아덴하트의 34번은 추모의 의미로, 팀 역사가 유지된다면 장기간 34번 배번의 선수가 없을 가능성이 컸었다. 10년이 훌쩍 지난 후, 뉴욕 메츠에서 FA로 온 노아 신더가드가 달게 되었다. 역대 한국인 선수로는 최지만 - 51번, 내야수, 2016년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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